빌립보 교회

신명기 6장 4절 "이스라엘아 들으라"의 말씀은 신앙의 부모가 자녀에게 자자손손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자녀는 이 말씀을 듣고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순종)는 성경적 자녀교육의 대명사이며 축복의 말씀입니다. 신약의 중심 주제가 '복음'이라면 구약의 중심 주제는 '기독교교육', '신앙교육' 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구원에 이르는 '복음'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기독교 교육(쉐마교육)' 모두 필요합니다.

랄프 윈터 교수의 4단계 전도 구분에 따르면, 땅끝 선교는 언어 문화적 측면에서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 전도하는 것이라 합니다. 따라서 미주 한인 가정에서 부모가 문화와 언어가 다른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은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선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교육과 신앙전수" 이제 시작하십시오.
유능하게 키우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부모님께 예를 갖출줄 아는 자녀로 키우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인복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작성일 : 15-03-29 07:36
가정신앙화(14) - 아담과 하와의 가정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748  
가정 신앙화(14) - 아담과 하와의 가정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행복해 하시는 감정이 담긴 표현입니다. 대표적인 표현이 ‘좋았더라’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며 하나님의 행복이 담긴 표현입니다. 그렇게 행복하다고 5일을 말씀하시고 6일째 되는 날 이렇게 표현

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조하신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특히 자신을 닮은 아담을 지으신 것이 너무 좋으셨습니다.

아담을 포함한 모든 창조는 하나님께는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좋다, 참 좋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담이 혼자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다시 창조를 하시는데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비뼈를 하나 취해 여자 하와를 만드십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부부로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행복은

물론 아담의 행복이 표현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우리는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실 때, 아담과 같이 말씀으로 하지 않으시고 굳이 아담의 갈비뼈를

사용하여 창조하시는 번거로움을 선택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종

속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

니라”(창2;25) 이 말씀은 아내와 남편의 진정한 관계를 멋지게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의 능력은 서로를 아름답게 보게 하는 것입니다. 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흠 조차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느낄

겨를조차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면 허물에 대해 관대해지게 됩니다. 온전히 하나였을 때 아담은 하와에

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이 말은 당신과 나는 하나라는 뜻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당신

이 나고 내가 당신”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모습입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모시고, 옆으로는 사람과 사람이 사랑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에 이상 징조가 포착됩니다. ‘이에 그들이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

였더라.’(창3:7) 벌거벌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낀 이유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를 짓고 난후 사람이 느

끼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는 핑계를 댑니다. 책임을 떠 넘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왜 먹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당신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라며

아내를 핑계합니다. “당신이 나고 내가 당신이야” 였을때는 분명 아내를 감싸고 자기 책임으로 돌렸을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람과 자연의 관계 모두 깨져 버렸습니다. 하나였는데, 모두 각각이 되어 버렸습니다. 수학에서

하나와 둘의 차이는 작은 차이입니다. 하지만 부부 관계에서 하나와 둘은 행불행 그 자체이며, 전부입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하나

됨은 행복, 나뉨은 불행입니다. 죽고 못하는 하나에서 남보다도 못한 둘이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는 죄로 하여금 부부 관계에 틈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틈이 생기면 바로 바로 메꾸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이 말씀은 ‘우리’라는 하나 됨을 반영함입니다. 죄는 ‘우리’를 ‘남’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또는 하나의 시작은

삼위 하나님이시며 사람의 관계에서는 부부 입니다. 부부는 이 세상 모든 하나 됨의 시작입니다. 가문이 하나 됩니다. 기업이 하나

됩니다. 심지어 민족과 나라가 하나 됩니다. 그러다가 죄로 인해 하나의 시작은 부부관계가 나뉘게 되면 가문과 기업이 붕괴 되거나

심지어 민족과 나라는 전쟁도 불사 하는 불행을 초래하게 됩니다. 역사가 이 모든 불행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부의 하나 됨은 가정

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더 나가 민족을 이룹니다. 부부의 나뉨은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불건전하게 하고, 민족의 미래를 어둡

게 합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같이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 계획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효합니다. 예수님

의 십자가 사건은 둘로 나뉨을 하나 되게 하심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을 회복하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하나됨을 위한 희생

입니다. 죄로 인해 둘로 나뉘었던 우리를 건져 주시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부가 영원히

하나될 수 있도록 하시는 열쇠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가 높아지고, 다스리려는 죄에

서 벗어나서 내 몸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남편만 새로워지는 것도, 아내만 새로워지는 것도 아닌,

부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제 지금부터 부부의 역사는 이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살아가게 하는

역사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