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교회



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정 [시편 128편]

작성일 : 17-05-22 07:46
업로드 : 최고관리자
 

성경 : 시편 128편 1-6절
말씀 : 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정

가족(家族), 한자로 집가(家)자를 쓸 때 지붕 아래 돼지희자(狶)를 씁니다.
사람 집에 사람인(人)자를 써야 하는데 돼지희자(狶)를 쓴 의미를 3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먹는 것, 경제적인 의미의 가정입니다. 옛날에 사람들은 사람이 살기 위해서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돼지를 기를 때 도망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울타리를 만들고, 지붕을 만드니까 동굴에서 사는 것보다 우리에서 사는 것이 좋게 여겨져 그 우리를 집으로 삼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을 식구라고 하지 않습니까? 먹는 입입니다. 가족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같이 먹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경제적 기반이 가정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3끼 밥을 해결해 주는 ‘식공동체’ 그것이 바로 돼지로 상징되는 것이기에 돼지희 자를 썼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둘째, 생물학적 의미를 뜻합니다. 돼지는 새끼를 많이 낳습니다. 번식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먹고, 결혼하느냐, 얘를 낳기 위함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번식하라, 생식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이념적, 종교적 의미를 뜻합니다. 유목민들은 돼지를 싫어합니다. 끌고 다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지낼 때 유목민들은 양을 바치고, 정착민들은 돼지를 바쳤습니다. 그래서 처음의 집은 돼지를 잡아서 조상들에게 또는 신에게 바치는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돼지를 잡아 드리는 사당으로서 지었던 건물이 지금의 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자 사람인(人)자를 봐도 사람인자가 서로 기대어 있지 않습니까?
인간(人間)에서 간(間)자도 인간 사이를 뜻하기 때문에 그 사이가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헬라어로는 ‘안드로포스’라고 하는데 그 어휘는 ‘아느로’라고 하는 남자하고, 눈이라고 하는 ‘옵스’의 단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즉 한 남자가 있고, 이 남자를 보는 또 다른 눈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두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한 사람으로 살 수 없고, 전부 한 사람 이상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을 글자가 보여주는데, 다석 유영모 선생님께서는 사람이 모이면 삶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영모 선생님은 삶이란 단어를 사 밑에 ㄹ, ㅁ 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사람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삶을 사람과의 관계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만이 살고 있다면 삶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고 신경쓸 필요도 없고, 문제로 대두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관계의 사이에서 일어나는데 그런 의미에서 가족이란 인간관계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곳입니다.

 
자신의 헌신을 통해서 사랑을 몸에 익히는 장소도, 타인에 대해서 책임과 의무를 익히는 곳도, 민주시민으로 역량을 배양하는 것과 기본적인 윤리 도덕을 몸에 익히는 곳도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족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한 국가,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것은 그 국가를 이루고 있는 기본 공동체인 가족 공동체가 건강하다는 의미이고 병든 사회는 결국 가족 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회 문제는 실은 어그러진 가족 관계의 산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 이 두 기둥으로  우리 믿음의 줄이 이어지는데 사람 사랑의 출발점이 바로 가정, 가족인 것입니다.


현 사회는 가족의 성공, 혹은 사회적 성공을 경제적인 성공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성공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면 내가 생각하는 성공이 어떤 길 위에서의 성공이냐가 먼저 규명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낚시로 고기를 잡는 일을 업으로 삼는 어부에게는 밤을 세워서 월척을 하는 것이 성공하는 것인 반면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시간 낭비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걸어가는 길이 어떤 길인가가 전제되지 않으면 우리가 성공하는 성공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전혀 구별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 한 개인의 인생과 저와 여러분 가족의 성공을 위해 어떤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가족의 성공을 이 세상의 방식대로 경제적인 성공으로만 이야기 한다면 가족에게 당당할 남편과 아내가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그것은 평가의 기준도 요건도 될 수 없습니다. 


돈을 상대적으로 많이 벌지 못하는 아버지와 남편은 무능한 아버지요 남편이 되는 것이고, 시장 원리에 따라 부모로부터 많은 투자를 받고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자녀들, 혹은 좋은 대학에 들어갔어도 좋은 직장에 들어가지 못해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자녀들은 결국 부모님들에게 부끄러운, 남들에게 자랑하지 못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사랑과 신뢰를 통해서 건강해 지는 곳입니다. 그 사랑과 믿음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요, 하나님을 통한 사랑과 믿음입니다.


가족은 절대로 희생과 섬김의 원리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장 원리를 강조한 아담 스미스도 ‘모든 것을 시장원리에 맞겨놓으면 다 잘된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가족은 다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장은 자신의 욕망대로 내버려 두면 그 욕망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시장은 번성하게 되지만 가족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족은 서로 섬김이요. 가정은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가정과 사회에서 섬김을 많이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서는 실패한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늘 조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기본적인 공동체인 가정에서부터 어떤 삶의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가족인 페밀리의 어원은 라틴어로 (서비스한다) 남자 노예를 세르바스, 여자 노예를 세르바, 남자 노예를 파밀로스 여자 노예는 파밀라라고 합니다. 즉 가족이 “노예”라는 것입니다. 노예 집단이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전에 있던 노예가 없어지면서 노예가 했던 일을 직접하게 되니까 가족인 아버지 어머니 자녀가 단위가 되어서 노예가 했던 일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가족 공동체라는 것은 사랑을 기초로 하지만 함께 의미를 나누면서 같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업 사회는 아버지 어머니 자녀들이 일체가 되어 함께 같이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회가 발전하면서 있는 사람들은 자꾸 땅을 늘리게 되고, 그로 인해 땅을 잃은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가 도시 노동자가 됩니다. 한 가장이 임금 노동자가 되니까 한 사람이 벌어서 집으로 가지고 와 그것으로 소비하여 살게 됩니다.


이와 같은 섬김을 기본으로 하는 가족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 공업사회로, 지식정보화 시대로 발전하면서 사랑으로 하는 섬김이 아닌 욕망을 드러내기 위한 섬김으로 탈바꿈되어져 갑니다.


예전 가정은 생산하는 곳이었는데 도시화가 되고 산업화가 되면서 가정은 생산하는 곳에서 소비하는 곳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남자로서 내가 얼마만큼의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느냐가 남자들의 프라이드요 자신의 존재감이요, 힘을 과시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돈을 많이 벌어서 아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더 큰 다이아몬드를 사주느냐는 식의 남자의 경쟁사회가 발전하게 됩니다. 나는 이만큼 가족을 잘 살게 해 주었다는 이 경쟁이 시작되어지면서부터 소비의 장이 누가 더 많이 소비하느냐 누가 더 사치품을 갖느냐에 따라서 가정이 어느새 허영의 장소가 되고 시장도 아닌데 시장원리에 따라 사랑보다는 물질이 그 가족을 만족하게 해 주는 기준이 됩니다.  이것이 남자 출세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그토록 치열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의 문제는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가정의 가장들과 만나고 싶어 하시는데 그 욕망에 노예가 되어 남성들이, 남편들이, 아버지들이 하나님 만날 기회를 잃어 가고 있음입니다.


세상은 한 인간의 행복, 한 가정의 행복을 시장 원리에 있다고 유혹하지만 그것을 쫓고 하나님의 말씀을 쫓지 않은 결과 지금의 가장은 시장원리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우리는 가정의 기초가 되는 사랑과 신뢰를 잃고 말았습니다. 사랑과 신뢰를 통한 행복과 기쁨, 자족의 삶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변함없이 말씀하십니다. ‘오고가는 모든 세대의 가정의 문제는 나를 가까이 함으로 회복될 수 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 길을 걸어야 복된 인생이고, 성공한 인생이 되는 것이지 시장원리를 쫓아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정에서 가족들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자녀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몇 번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의 대부분 가정에 하시는 명령은 ‘좋은 부모가 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녀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 말씀하시지만 그 횟수는 몇 회에 불과합니다. 왜 성경은 먼저 좋은 부모가 될 것을 명령하시느냐면 세상에 자녀가 있거 전에 부모가 먼저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좋은 부모가 좋은 자녀를 만듭니다. 좋은 부모 밑에서는 나쁜 자녀이 나오지 않습니다. 좋은 부모가 더 나아가 좋은 믿음의 부모가, 바른 믿음, 바른 가치관, 바른 인생관을 가지고 살면 그 자녀들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이 일차적인 교육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모든 부모님은 스스로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녀들에게 노출된 교육의 장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의 입의 기능보다 보여지는 삶을 통해 여과없이 교육이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부모가 그리스도인으로 더욱 성숙되어져야 함의 이유는 그 분량만큼 성숙된 그리스도인 자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분이 공직에서 은퇴하고 나서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나서 “아 내가 세 가지를 몰랐구나!” 하시더랍니다. 평생을 공직자로 살다가 은퇴하고 하고 나서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 본 것입니다.
첫째 인생에 대해서 내가 몰랐다. 철없이 인생을 뛰어 왔구나, 그래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을 좀 알아야 되겠다 신을 알아야 나를 알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두 번째가 내 아내가 누구인지 알아봐야 되겠다. 평생을 아내와 대화를 한번 못해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하고 여행도 하고, 아내하고 의자에 앉아서 대화도 하고 해서 알아야 되겠다. 세 번째가 베풂을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공직사회는 경쟁 사회이니까 승진이라고 하는 경쟁 사회에서 늘 상대를 짓밟고 살다 보니까 베풂의 삶에 대해서 몰랐다는 것입니다.


노인과 어른의 차이는 성숙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기적이면 노인이며 이타적이면 이 시대의 어른이 되는 것인데 위의 한 공직자분은 지금까지는 자기만 아는 노인으로 살았음을 반성하고 타인을 생각하며 이타심으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결단이 가족을 위해서 필요하지 않겠는지요?


지금까지 가족을 위한다고 했던 나의 고백들이 단지 기분상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우리는 결단하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녀의 관계가 부모와의 관계라면, 가족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지 못하면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과 가족은 우리 삶에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여 순종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우리 가족 행복의 길이 있고,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고, 하나님 예배하는 정신으로 서로를 섬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