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교회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빌3장4-6절]

작성일 : 16-12-13 10:13
업로드 : 최고관리자
 

성경 : 빌립보서 3장 4-6절
말씀 :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인


2006년도 김우현 감독을 통해 세상에 널려 알려졌던 분으로 당시 크리스천들에게 뿐 아니라 일반사람들의 가슴에도 신성한 충격과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던 분이 계십니다. 바로 맨발의 성자로 알려졌던 최춘선 할아버지이십니다. 거친 맨발에 엉성하게 쓴 전도 문구 판을 목에 걸고 지하철에서 소리치며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잡지의 사진과 문구를 가지고 독특한 전도지를 준비하였습니다. 그것을 동네 전봇대에 붙여놓습니다. 그리고 엉성하게 쓴 영생복락, 예수천당, 만인구원을 모자에 끼우고 또 그것을 가슴에 붙이고는 골목골목 그리고 지하철을 다니면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50년간 미룬 노예해방, 38선 직통 해방을 외치고 사람들을 미스터 코리아 안중근, 미스 코리아 유관순, 민영환, 이순신이라며
 ‘Why Two Korea?’”


다큐멘터리를 만든 김우현 감독의 해석으로는 유관순과 안중근 같이 나라를 사랑하고 진리와 자유를 위해 자기를 내던져 희생한 분들이 진정한 한국인인데, 왜 두 개의 코리아로 분단된 조국이 있겠느냐는 외침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통일이 될 때까지 신발을 신지 않는다며 30년을 맨발로 다녔습니다. 독립유공자이기도 하셨던 할아버지는 유공자에게 지급되는 연금혜택도 마다하시고 청빈의 삶을 평생 사셨습니다. 사람들이 노망들었다거나 미쳤다고 비웃어도 마치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연명하며 회개하라고 외치던 세례 요한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최춘선 할아버지께서 세간의 화제의 인물이 되셨던 것은 그분의 과거 삶의 이력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릴 적 일본 유학을 했고, 5개 국어를 구사하셨던 수재이셨습니다. 또한 김구 선생님과 독립 운동에도 당참 하셨으며, 큰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큰 부를 소유하셨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가난한 이웃들에게 전 재산을 나누어 주고 본인은 몇 벌의 옷과 맨발로 평생을 사셨던 것입니다.
이런 과거의 삶과 비추어 지금의 생활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게 비춰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최춘선 할아버지로 하여금 과거와 전혀 다른 삶을 살도록 했을까요?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과거의 자신의 이력을 모두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전파하며 사셨던 것입니다. 또한 애국 크리스천으로서 조국 통일을 이루지 못한 후손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맨발로 평생을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최춘선 할아버지께서는 아들 목사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예수님을 안다면 어떻게 그렇게 살수가 있나?”


최춘선 할아버지와 같은 삶의 이력을 갖고 있는 분이 오늘 본문의 바울사도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육체를 신뢰하였고, 그것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의’로 여기며 자랑했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육체적으로 내세울 것이 많고 자랑할 것이 많을수록 구원에 이르기에 유리하다고 믿었습니다. 예를들면 태생적 배경이나 인간의 재능, 의식이나 유전, 할례, 율법과 도덕성 등을 들어서 그것들이 자신의 구원을 위한 필요한 조건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들만 그렇게 믿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조건이라며 강요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이런 주장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람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고 사람의 행위로 이룰 수 없음을 믿고 가르쳤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도 우리의 구원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혼란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가르침을 주는 바리새인들을 경계할 것을 당부하면서 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구원을 위해 몸을 상해하기까지 하지만 그런 노력은 고통만 따를 뿐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못하는 어리석은 일들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입니다. 그 마음의 할례를 바울은 3가지로 증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둘째,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번째인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5,6절에서 자신이 예전에 신뢰할 만한 것, 곧 육체를 자랑하는 그 어떤 율법주의자들보다 결코 못할 것이 없는 자신의 육체적 자랑거리들을 나열합니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빌3:4)


첫째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는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히브리인의 정통성을 나타냅니다. 당시 정통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에게 정통성을 강조한 바울은 설명은 더욱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할례로 말하자면 생후 8일 만에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대로 율법에 따라 태어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이 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틀림없이 이들 중 얼마는 이방 세계로부터 개종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은 낳은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된 후에 할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율법을 따라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바울은 그들보다 혈통적으로 흠 없는 유대인이라는 것을 예를들어 그들보다 분명 더 우월한 입장에 서 있음 강조한 것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족속임을 자랑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임을 밝히는 것은 그가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사람 즉 선민이었으며 언약의 백성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다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삭 그리고 그의 아들 중 야곱에게서 난 자들만이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족속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바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계승되는데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면서 주신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저희가 잘 알고 있듯이 이삭의 아들 야곱의 다른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름이 민족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창32:28).
바울은 비록 행정상으로는 소아시아의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로마 시민이었지만(행22:27,28), 자신이 혈통상으로는 이방의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이었음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이야기 하면 나는 비록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나의 부모님은 모두 한국 분이라는 것과 같은 설명입니다. 지금은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바울 당시에는 혈통의 문제가 바로 신분의 문제가 되는 때였기에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셋째는 베냐민 지파임을 자랑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족속’임을 자랑한 뒤 그중에서도 12지파의 한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데는 여러 가지 특징들이 있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작은 지파였지만 매우 높이 평가되는 지파였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 엘리트요 최고위층의 귀족으로 여겨졌습니다. 베냐민은 야곱이 총애하던 라헬의 막내아들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여 14년을 일하였지만 그 년수를 수일로 여길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렇게 결혼하였지만 10명의 자녀를 낳기까지 라헬을 통해서는 단 한명의 자녀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애를 태우던 중 11번째로 태어난 아들이 요셉이었고, 12번째가 바로 베냐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게 되고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지내게 됩니다. 더욱이 라헬은 12번째 아들인 베냐민을 낳다가 죽게 됩니다. 핏덩어리만 남겨 놓고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것입니다. 요셉 마저 없는 상황에 야곱이 베냐민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스라엘에게 베냐민이 특별할 수 밖에 없었던 것과 같이 역사적으로도 베냐민은 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특별했습니다.
먼저는 야곱의 12아들 중 베냐민만이 약속의 땅이었던 가나안 땅에서 태어났습니다(창35:9-19).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베냐민 지파였고, 하만의 유대인 학살 정책에서 하만의 계략을 폭로하고 유대인들을 구원했던 에스더 왕후와 이를 뒤에서 도왔던 외삼촌 모르드개가 또한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야곱이 죽기 전에 12 아들들에게 땅을 상속해 주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의 심장이라고 여겨지는 예루살렘이 바로 베냐민 지파의 영토에 속해 있습니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민족이 나뉘어졌을 당시 다시금 통일 왕국을 세우는 일과 포로에서 돌아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주축 세력으로 활동했던 지파역시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여 바울은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도 베냐민 지파라는 말을 추가로 설명함으로 자신이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서도 가장 확실히 인정을 받고 있는 지파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임을 자랑합니다.
‘히브리인’을 나타내는 ‘헤브라이오스’는 본래 ‘건너편에 있는 지방에서 건너온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이브리’의 헬라어 음역입니다. 이 ‘이브리’라는 명칭은 유브라데 강을 건너서 이주하였던 아브라함에게 가장 먼저 붙여진 이름이었고, 이때부터 그의 후손들도 이 명칭으로 불리웠습니다(창14:13). 여기서 바울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말한 것은 그야말로 자신의 피 속에 순수한 히브리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순수한 이스라엘 족속 중에 가장 순수한 자란 말로 혈통적으로 유대인일 뿐 아니라 언어나 습관에 있어서도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 하면 비록 다른 나라에서 건너와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서 영어권에서 공부를 하지만 자신의 모국어인 한국어도 잘 사용하고 있고, 비록 미국의 문화권에 살아가고 있지만 한국 문화의 습관도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민 2세 또는 3세들이 모국어를 현지어 만큼 잘 사용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큰 자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온 자녀들이 미국학교 적응을 위해서 한국어 보다 영어공부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나면 학교생활에 거의 완벽하게 적응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 기간에 모국어를 그만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실례로 초등학교 3학년을 한국에서 마치고 미국에 온 학생이 3년이 지나자 모국어를 거의 80%를 잃어버리게 되어, 마치 외국인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수준이 되는 것을 봤습니다. 이런 이민생활의 어려움을 감안하면 로마에서 시민권자로 태어나서 자란 바울이 모국어는 물론 그 문화와 습관까지 완벽하게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자랑 그 이상의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설명한 4가지 즉,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인 것, 베냐민 지파인 것,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것은 바울 스스로가 선택할 여지없이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특권이었습니다.


다음 주에 우리는 3가지를 이어서 살펴볼 것입니다. 즉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였던 일, 율법의 의로움으로는 흠이 없는 삶입니다. 이 세 가지는 바울이 후천적으로 선택하고 노력했던 삶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육체적으로 자랑했던 4가지만으로도 바울은 바리새인들의 자랑을 앞도가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금수저와 같은 배경으로 하여 더 많은 스펙들을 쌓았으니 육체적으로 바울을 능가할 만한 이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육체의 일로 구원을 얻는다면 바울은 이미 행위로 구원에 이른 사람이어야했습니다. 하지만 바울 자신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구원이 팔일 만에 받은 할례 때문도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이기 때문도 아니요, 베냐민 지파 때문도 아니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기 때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요. 그분을 믿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온갖 이력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과 달리 바울은 그동안 자랑거리로 삼았던 그 모든 것이 더 이상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배설물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나를 옳은 삶으로 인도하지도 못하고, 나를 구원에 이르게도 하지 못하는 것을 위해 사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을 자랑하는 일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요, 평생을 그것을 위해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은 삶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바울의 자랑거리가 달라진 것입니다. 이제는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요,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자랑하며 사는 것이요, 그분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것입니다. 또한 전에 나와 같이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잘못알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에게 눈물로 호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육체적인 것에 소홀히 여겨야 한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그동안 구원을 얻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면 이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하고, 여러 가지 선행을 하는 것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기에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주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요. 구원을 더욱 아름답게 이루어가기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최춘선 할아버지처럼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하게 살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구원에 이르기에 유익하게 못하는 육체의 일을 목적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지도 말고, 오직 우리를 구원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우리를 은혜로 구원케 하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며 그분을 자랑하며 살며 그분을 증거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쓰는 바울은 지금 감옥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감정을 기쁨이 충만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감옥에서 조차 기쁨과 감사한 마음으로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혈통이나 신분이나 특권이나 계급이나, 물질이나 인간의 성취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기쁨과 행복이 출생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의 학문의 수준과 그의 업적에 있는 줄 알고 그것을 위해, 그것을 얻고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 삶이 옳은 삶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을 증거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을 믿는 순간 자신의 기쁨과 행복은 물론 구원케 하는 능력이 출생이나 국적, 학문과 업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바울의 삶은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 붙잡힌바된 삶을 살게 되면서 세상이 줄 수 없었던 기쁨과 감사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구원의 감격이 그를 이끌어 갑니다. 이 구원의 감격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는 서로 출생의 배경이 다릅니다. 학문적 수준이 다르고, 업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나름 자랑거리로 삼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랑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당신보다 낫다’는 우월감 외에 다른 능력은 없습니다. 차별의 벽을 만들어 나를 동떨어지게 합니다. 그것을 자랑하면서 얻는 자기만족이 있습니다. 하지만 허망한 만족감입니다. 거기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마치 바닷물을 먹는 것과 같이 자기 자랑을 위한 목마름만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삶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증인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나름대로 남들에 비해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소유하고, 많은 경험과 업적을 쌓아 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그런 만족과 자기 위안의 요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그것 때문에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까? 그것으로 평안함이 마음에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무엇을 자랑하며 살아야 하는지 말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