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교회



하나님의 꿈을 품은 자는 실족하지 않습니다 [시편57편]

작성일 : 16-07-03 18:45
업로드 : 최고관리자
 

성경 : 시편 57편
말씀 : 하나님의 꿈을 품은 자는 실족하지 않습니다.



시편은 구약시대의 찬송가에 해당합니다. 영혼의 해부학이라도 하는데 삶과 영혼 속에 깃든 온갖 문제가 시편 속에 절실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전체가 150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에 73편이 다윗이 쓴 시들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시편은 57편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57편은 삶의 위기와 역경 그 가운데서 절망하고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 있습니다. 


57편 표제말에 보면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소개 글에서 "인도자"란 말은 성가대 지휘자를 일컫고 '알다스헷'이란 곡에 맞추어 부르란 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리랑 곡에 맞추어 부르란 식입니다. 그리고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란 말의 그 굴이 바로 아둘람 굴입니다.


57편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표제에서 설명하듯이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백 명은 아둘람 굴에 숨어 숨죽이고 살아가고 있던 때입니다. 사울 왕이 보낸 수색대가 온 나라에 깔려 있어 다윗 일행이 눈에 뜨이기만 하면 즉결처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때입니다. 그런 절체절명의 자리에서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여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말씀 드리면 이와 같은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좌절할 수 있는 현실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일굴 수 있었습니다.


본문 57편 2절 말씀입니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아둘람 공동체는 사울 왕의 부당한 핍박에 쫓겨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공동체였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사울 왕을 원망하거나 사울 왕을 상대하려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상대하길 원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해치려고 무슨 수단을 다 동원할지라도 다윗은 그로 인하여 위축되거나 좌절당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우리는 평소에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휘둘립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대하는 태도나 말에 따라 상처를 받거나 낙심하거나 분노합니다. 그것도 너무 쉽게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여러분들은 누구로 인해 상처를 받고 누구로 인해 분노하게 됩니까? 부모님이십니까? 형제입니까? 자녀입니까? 직장 동료입니까? 우연히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도 우리는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을 만게 됩니다.
다윗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장인인 사울왕이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분노할 수밖에 없도록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사람은 다름 아닌 가족이며 부모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이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음에도 사울 왕을 탓하거나,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이란 자기 확신과 믿음 안에 서있었습니다. 이런 신앙과 마음가짐이 다윗을 좌절을 넘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동력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환경이 있을 때 오히려 하나님을 상대하는 습관을 가겼습니다. 힘들게 하는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낙담케 하는 환경에 마음을 두지 않고 그때마다 하나님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은 문제를 만날 때마다 더욱 더 하나님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앞글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아둘람 굴에 모인 다윗과 400여명의 사람들은 최악의 조건에서 생존에 급급하여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또는 우리 주변에 생존을 위해 급급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신분문제, 경제력의 문제, 처지의 문제 등을 안고 살아가는 다윗과 아둘람 공동체 사람과 같은 형편에 놓인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범인들 같았으면 탄식하고 비관하여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탄식이나 비관 대신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9). 이런 마음가짐과 삶의 방식이 그들로 위대한 역사를 건설함에 성공에 이르게 한 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이 좌절을 넘어서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들의 특성은 감사와 찬송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위기의 때에 그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기도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기도를 더 많이 드렸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자신의 구원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나의 처지와 형편과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걱정했습니다. 내가 낮아지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이로인해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낮게 취급되는 것은 문제가 된다는 마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은 자신의 처지가 땅 가운데서 가장 밑바닥에 머물고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 높이까지 이르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자신은 온갖 좌절과 절망적인 상황으로 인해 땅 속에 묻힌 듯한 답답한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 위에 높이 들리기를 원했고, 자신은 세상의 모역거리로 전락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만을 원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절망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억울한 상황을 생각하면 절망할 수 있지만 다윗은 자신의 상황 개선에, 인생 역전에 관심을 두고 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만 드높여진다면 그것으로 자신의 기쁨을 삼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으로 자신의 만족을 삼을 수 있었던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둘람굴의 그 절박한 현실에 직면하여 있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하여 자신의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마음은 확고했습니다.
아둘람 굴에서 숨을 죽이고 살았던 다윗과 사백 명이 최악의 생존조건을 극복하고 살아남아 끝내는 다윗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무슨 힘으로 그렇게나 열악하였던 삶의 조건을 견뎌나갈 수 있었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오늘 본문 7절과 8절 말씀에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습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겠습니다.”


그들은 가슴 속에 남다른 비전을 품었다. 암담한 시대에 역사의 새벽을 깨우는 무리가 되겠다는 비전이었습니다. 시대의 새벽을 깨우는 큰 사명에 자신들이 부름 받았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난이 자신들만의 고난이 아니라 민족과 백성들 전체가 함께 겪고 있는 고난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들이 직면한 절망적인 정황이 자신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와 역사 전체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역사의 새벽을 깨우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런 확신과 비전이 있었기에 그들은 감사할 수 있었고 그런 사명과 비젼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시대의 새벽을 깨우는 사명은 비단 그들에게만 주어진 사명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주어진 사명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역시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시대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이유로 치열한 생존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고 하십니까? 생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누구를 위해서 전력질주 하십니까?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위해서, 다른 부모들처럼 모든 것 다 해주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에 자녀를 위해서.... 이유야 어떻든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존 세계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과정이고 수단이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이 비전과 목적의식이 우리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절망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낙심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 탓만 하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는 치열한 생존세계에서 살아남아야만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바로 그가 그토록 사모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땀을 흘리며 수고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그분의 나라를 일구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라보시는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생각하면 다윗에게 절망의 시간은 사치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불평하고 불만하고, 억울해 하며 분노하면서 시간을 보내기엔 남은 시간들이 너무 금 쪽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이와 같은 신앙이 목표가 없었다면 다윗과 그의 공동체는 중국의 양산박이나 한국의 활빈당과 같았을 것입니다. 다윗과 함께 했던 무리에 대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무엘상 22장 1,2절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그 곳을 떠나 아둘람 동굴로 도망가니 그 형제들과 아버지 집안의 온 집안이 그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았다. 이에 모든 곤고한 자, 모든 빚진 자 및 모든 불만을 품은 자가 그에게 모이매 다윗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요즘 말로 하면 부도난 자, 수배 당한 자, 그리고 뜻은 있으나 펼칠 길이 없는 자들이 그에게 모여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모인 곳은 양식은 말할 것도 없고 마실 물조차 부족한 후미진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400명이 머리를 맞대고 할 수 있는 모의는 잘해야 중국의 양산박이나 한국의 활빈당 같은 부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좋은 지도자 다윗을 만났습니다. 다윗이 그들의 여러 주장 중에 한 가지만이라도 “나라가 어떻게 우리에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동의 하였더라면 그들 역시 활빈당과 같은 부류가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로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실추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어찌했든 하나님께서 하늘 높이 들리셔서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그것을 그들 앞에서 고백하고 그들과 함께 고백하였습니다.


이곳에 모이신 분들은 서로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저의 처지를 아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받은 상처가 다윗만 합니까? 이곳에 모이신 분들이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만 하십니까? 그들도 처음에 아둘람 굴에 모였을 때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함이었습니다. 먹을 것을 얻고자 하는 사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 하고 싶은 사람, 자기와 같이 불만을 품은 사람 찾아서 반란을 도모하자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뜻과 꿈을 모두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좇기 시작했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자신을 위한 공동체가 아닌 하나님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자고 모두가 동의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나 둘 해 나갑니다. 그중 그들이 다윗과 함께 시작했던 것은 불만을 멈추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구원해 주실 것에 대한 기도를 멈추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들은 다윗의 지도력하에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여 역사를 빛내는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생존 자체가 문제였던 그들이 뜻을 바꾸고 감사와 찬양 드리는 것을 시작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일궈내는 주역들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기존체제, 기존 질서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체제의 중심에 서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기존 질서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기존 사회에서 제대로 구실을 하지 못하던 한 많던 사람들, 빚진 자, 쫓기는 자, 마음에 상처가 많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와 같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상처를 보듬어 주고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선물해 주는 주역들이 된 것입니다. 자칫 중국 역사의 양산박이나 우리 역사의 활빈당 무리가 되어 사울의 군대에 잡혀 떼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군대를 만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승리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기쁨은 민족의 기쁨이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아직도 여러분 중에는 여러 가지 절망의 이유, 상처 받은 고통과 억울함 등을 갖고 계신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을 좌절하게 하고 평생을 불평하며 원망하고, 품었던 꿈과 비전을 내려놓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도록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렇게 주저 앉아서 남은 생애를 사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렇게 좌절하고 원망하며 살게 된다면 그동안 힘써 살아온 내 자신에게 미안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죄송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에겐 다시 일어설 힘이 없을 수 있습니다. 일어나고 싶지만 이미 무릎에 모든 힘이 빠져 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서 이런 결단을 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습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겠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같은 결단을 하고 같은 비전을 품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시는 겁니다. “성령님 도와주세요. 이렇게 절망에 갇혀 있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서고 싶습니다. 다시 달리고 싶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달리고 싶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세요.”라고 기도드리는 겁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다윗과 그의 무리들이 했던 일들을 저와 여러분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절망과 포기와 바꾸었던 비전을 다시금 가슴에 품으십시오. 불평과 불만, 억울함과 분노의 마음 대신에 감사와 찬양의 옷을 다시 입으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외치십시오. “나 하나님의 사람, 나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사람은 절대 절망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저와 여러분을 통해 큰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곡한 마음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