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 로마서1장 1-6절

작성일 : 15-11-02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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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로마서 1장 1-7절
말씀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바울이 세 번째 전도 여행을 하면서 겨울에 고린도라는 도시에 잠깐 머물게 됩니다. 이곳에 잠시 머무는 이유는 쉼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성경 곳곳에 로마교회가 가고 싶다는 마음의 간절함을 표현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꾸 길이 막혀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과 더불어 계획을 먼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편지를 쓰려던 때의 바울의 나이는 50대에 접어 들고 있어서 시력이 별로 좋지 않았는지 ‘더디오’에게 부탁하여 편지글을 받아 적게 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불러 주는 대로 더디오가 기록을 하고 그것을 여 집사 뵈뵈의 손에 들려 로마로 전달하게 합니다. 이 편지가 기독교 역사상 교회를 개혁하고 부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로마서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 기독교에 얼마나 중요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지 슈페너라는 학자는 성경을 하나의 반지라고 한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이 보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성경이 우리 눈 앞에서 읽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로마서의 첫 장 첫 절을 읽으면 매우 낯선 표현이 나옵니다. 바로 ‘종’이라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일컬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원어로 말하면 ‘노예’입니다. 자신에 귀에 이름이 새긴 귀걸이를 달면 그 사람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없습니다. 생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나 꿈, 계획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당시 로마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66만 명 이상이 노예로 살았다고 합니다. 이들에 표현으로 적절한 표현이 하나있습니다. “노예와 당나귀는 똑같은데 노예는 말을 할 줄 알고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표현입니다. 당시는 노예를 말할 줄 아는 짐승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석학이었던 바울이 일면식도 없던 로마 교인들에게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의 소개방법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강요에 못이겨 했던 고백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마치 종과 같을 수 있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 드리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오히려 그 관계가 끊어질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자처합니다. 그 이유를 2절부터 4절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2절).


바울이 확인한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선지자들이 소개한 하나님의 복음이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은 종' (사 61:1),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고난의 종', 다윗이 시편 16장에서 예언한 '썩음을 당치 않을 거룩한 자', 이사야 49장 6절에 등장하는 '땅 끝까지 구원을 베푸는 이방의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니 바울이 어찌 자신을 자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니 바울이 어찌 자신의 이와 같은 고백 드림을 부끄러워하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을 불러주신 분이 자신이 지금까지 율법을 통해서 연구하면서 뵈옵기를 갈망했던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뵈었으니 어찌 잠잠할 수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다시 한 번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뜨거운 가슴으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 하고 외쳤을 것입니다.


자기를 불러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사도로 임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 앞에 너무 감격해서 목 놓아 울었을 것입니다. 이 감격이 자기를 기꺼이 종으로 팔아 버릴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드디어 그는 억지로가 아니라 자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남은 생을 살기로 가슴속에 백 번 천 번 다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나 자기를 예수의 종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예수의 종으로 가야 할 길이 몹시 험하다는 사실도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그에게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6). 얼마나 많이 매를 맞아야 하고 얼마나 많이 감옥에 가야 하고 얼마나 모욕과 멸시를 당해야 하는지 주님이 다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여, 감사합니다. 가겠나이다" 하고 자기를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 후로 그는 고린도전서 4장 9절에서 토로한 것처럼 천사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롱하고 비웃는 길이었지만 그는 기쁘게 발을 옮겨놓았습니다.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충성하는 생을 살았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찬송가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의 가사 내용을 접할 때면 마치 바울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뜨거운 전율이 흐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종이 되기를 기뻐하는 모든 사명자의 진실된 삶이 전해져 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 찬양을 눈물 가운데 부른적이 있지 않습니까? 부끄러움이 왠 말입니까? 아마도 이 찬양을 눈물 가운데 부르는 때의 우리의 심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감격스럽고 자랑스웠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부름받아 나선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따라 가오리니
어느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몸에 지닌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몸에 지닌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존귀영광 모든권세 주님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지고 가오리다
이름없이 빛도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없이 빛도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우리는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바울이 아니고, 목회자나 선교사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으로 자신의 몫을 다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소명을 받은 자도 아니고 말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의 신앙 출발도 바울도 마치 흡사합니다. 자발적이지 않았습니다. 끌려다는 듯이 시작했고, 코 낀 것과 같은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바울도 처음부터 마음이 내켜하진 않았습니다. 거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의 신앙이 억지 춘향의 모습이어야 하겠습니까? 다음 단계로 들어서야 합니다. 바울처럼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하나님이요 구원자 되심을 철저히 확인하고 감격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송두리째 예수의 종으로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계시는 믿음의 수준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로마서의 수신자인 로마교회 교인들로,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평신도들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나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편지를 쓰는 바울 뿐 아니라 편지를 받는 로마교인들 모두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깨워 주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종 됨을 통해 기쁨과 평안, 감사와 감격된 삶을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로마 교인들로 깨닫게 하고 함께 그 삶을 누리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물가 밖에서 물놀이 하는 사람들을 보는 기쁨도 있습니다. 하지만 옷 젖을 각오하고, 수영하고 난후 번거롭지만 씻을 각오하고 물놀이에 동참할 때의 기쁨에 결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바울의 삶을 볼 때만 감격적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나의 삶을 통해 대리만족하지 말고 직적 종된 삶,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함으로 직접적인 만족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도도 아니요 선교사도 아닌 로마교회의 교인들 역시 자기와 똑같이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부인하면 우리는 로마서를 덮어야 합니다. 그 안에는 온통 예수 믿고 그의 종 된 자들의 이야기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그분의 종 됨을 위해 자신의 옷을 벗고 은혜의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다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의 소유가 아닌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뜨거운 가슴으로 우리의 달라진 신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가 예수의 종임을 잘 모르고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모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은 바울의 철저한 ‘종의 선서’입니다. 이 종의 선서가 오늘 저와 여러분을 다시금 일깨우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 20).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 8).

선서문에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한 사람도 제외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억지로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기꺼이 던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기를 위해서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치는 종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되려면 가슴속에서부터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솟구쳐야 합니다. 주님께 기도드리십시오. 주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드리십시오. 사랑하면 자발적인 기쁨의 종이 되는 것이고, 사랑이 식으면 마지못해 억지로 복종하는 불편한 신앙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하는 정도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주인 잘못 만나 망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자신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결국은 망합니다. 결국은 허무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위대한 지도자요 가장 안심하고 우리 생을 맡길 수 있는 주인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사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전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면 자유함이 있습니다. 평안함이 있습니다. 능력이 따릅니다. 그리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종으로 철저히 순종하면 마음에 평안이 얼마나 넘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교회에 원하시는 것은 구름떼와 같이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은 물론이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귀걸이를 달고 "주여,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진실한 자기 종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곽영구”.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철저히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쓰임받기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면 성령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일에 가정과 사회, 직장에서 쓰임받는 영광스러운 저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