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교회

아버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열정이 있습니다. 불타는 열정, 거룩한 열정, 쉬지 않는 열정, 비전에 이끌리는 열정, 그 위대한 열정을 품고 아버지로서의 역사를 써 왔습니다. 눈물과 땀을 흘리며,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써 왔던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열정과 헌신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나 홀로 꿈을 꾸면 그것은 단지 꿈으로 끝날 수 있지만,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꿈은 잠을 자야 꾸지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열정을 품고 남편으로 아버지로 잠자고 있던 열정을 깨우십시요. 그리고 기도하며 성취를 향해 걸음을 내딪으십시요

인생에서 남자로 태어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취도 중요하지만 존경받는 남편이요,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 비전을 이루어 가도록 빌립보 교회가 함께 하겠습니다.


 
작성일 : 16-12-06 01:00
영혼구원이 가장 우선순위에 있음을 가르친 아버지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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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리엄 캐리- William Carey, 1761-1834
현대 선교의 아버지. 침례교선교회의 창설자 가운데 한 사람인 월리엄 캐리는 대위임령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주장하며, 인도 선교를 개척하여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선교사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월리엄 캐리의 부모는 에드몬드와 엘리자베스 캐리로 영국 노템토쉐이어의 포리스퍼리 마을에 사는 면직공이었다. 성공회 전통에서 자란 그는 자연과학 특히 식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다행히 그의 아버지가 그의 관심을 인정하고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버지는 월리엄이 6살이었을 때 교회의 회계로 임명되었고 초등학교 교장이 되었다. 어린 케리는 언어에 대해 남다른 재능이 있었고 혼자 라틴어를 공부했다.


에드문드는 월리엄이 14살이 되자 인근 마을 해클톤에 있는 제화공의 견습생이 되도록 했다. 그곳에서 동료 견습생이 성공회 교회를 그만 다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클톤에서 작은 회중교회 Congregational Church를 시작하자고 설득했다. 제화공이었지만 월리엄은 대학교육을 받은 이웃의 도움을 받으면서 혼자 헬라어를 공부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월리엄은 하나님과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선교사적 마음을 품는데 소중한 씨앗이 되었다. 그에게 제화 기술을 가르쳐 주던 제화공이 죽자 그는 토마스 올즈라는 다른 제화공의 견습생이 되었다. 그도 곧 죽었는데 월리엄은 그의 가게를 물려받았다. 신발을 만들면서도 월리엄은 히브리어와 이태리어와 불어를 공부했는데 그는 이 두 가지 일에 집중했다. 1783년 라이랜드가 그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뒤로 그는 침례교도가 되었다.


그가 2년 뒤 모울톤 마을에 있는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자 그의 학문적 평판도 올라갔다. 그 지역의 침례교회도 그를 목사로 청빙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조나단 에드워드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와 그의 친구인 앤드류 풀러의 글들을 읽으며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굳혀갔다. 캐리는 전 세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임무라는 자신의 믿음을 역설했다. 그러나 몇몇 유명한 기독교 학자들이 오늘날에는 당연시 받아들여지는 성경적 원리를 주장하는 그에 대해 심각하게 반대했다.


캐리가 라이체스터의 한 작은 침례교회에서 전임목사로 사역할 때 그는 일종의 ‘선교 선언’ 이라고 할 수 있는  「이교도 회심을 위해 사용해야 할 기독교인들의 의무에 대한 연구」 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5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선교 활동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여전히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2부에서 캐리는 초대교회에서 시작해서 존 웨슬리에서 끝나는 선교활동 역사에 대해 윤곽을 그렸다. 3부는 이 세상의 모든 국가들의 지역과 인구와 종교 통계표를 포함하였는데 이 분야에서 이것은 최초의 시도였다. 4부에서는 언어 학습의 어려움이나 타지에서 접할 수 있는 위험과 같이 다른 사람들이 선교사 파송하는 것에 대한 반대 이유들에 대해 대답했다. 마지막 5부에서는 침례교선교회 설립을 요청하였으며 그 후원에 대해 설명했다. 이 책은 선교 활동의 기초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나중에 월리엄은 ‘죽음 없는 설교’ 라는 선교 옹호론적인 설교를 했다. 설교를 하는 가운데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것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것을 시도하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했다. 이것은 그의 가장 유명하면서 자주 회자되는 인용구가 되었다. 이 설교는 1792년에 오늘날의 침례교선교회인 이교도에 복음 전파를 위한 특별침례교회의 설립에 촉매 역할을 했다. 이 선교회는 선교후원금 모금과 어느 지역에 선교적 노력을 집중할 것인가 등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 토론했다.


이 선교회에 첫 선교사 중 의료선교사 존 토마스는 캘커타에서 한동안 지냈으며 되돌아가기 위해 영국에서 선교후원금을 모금하고 있었다. 토마스가 선교회에 영입되자 캐리도 그와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캘커타에 도착하자 캐리는 벵갈어를 짧게 공부한 뒤에 선교회와 현지 선교사무실을 설립하기 위한 재정적 후원을 위해 인디고 농장에서 감독 일을 맡아 일했다. 그 농장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벵갈어 신약 성경의 첫 번째 개정판을 완성했고, 공동체적 삶과 재정적 독립과 현지 사역자 훈련 등 선교 공동체의 원칙들을 구상했다. 현대 선교사들은 아직도 이 원칙들 가운데 많은 내용을 사용하고 있다.


때맞추어 많은 동료 선교사들이 인도에 도착했다. 이 선교사들과 가족의 주거를 위해 세람포르의 한 주택을 구입했다. 그리고 벵갈어 성경을 출판할 인쇄소가 만들어졌다. 현지인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쉬나 팔이라는 첫 인도 성도가 나왔을 때, 선교사들은 인도 기독교인들이 카스트제도를 따라서는 안된다고 결정했다. 카스트제도는 ‘사람 위에 사람이 있다’ 는 차별을 기초로 세워진 것이지만 캐리와 동료 선교사들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동등한 존재라고 전하고 다녔다. 그 결과 수드라계급의 딸이 브라만계급의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이것은 인도 사회에서 터부시 되는 일이었다.


월리엄은 또한 벵갈어와 산스크리트어 문법을 집필했고 성경을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현지어로 집필된 고전들을 영어로 번역하여 고국의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의 가장 큰 공헌 가운데 하나는 영아 제사와 같은 이교도의 관습들을 포기하도록 현지인들을 설득했던 것이다. 월리엄이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선교팀은 44개의 언어와 방언으로 성경 전부 혹은 일부를 번역하여 인쇄하여 배포했다. 그가 인도에서 이룬 성취는 이것들 말고도 많다. 그는 인도에 증기기관과 은행의 개념을 소개했고 사채나 고율의 이자를 대가로 하는 대부를 지양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인도의 한센병 환자들을 보다 인도적으로 대우하도록 호소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인도농업협회를 설립했고 천문학을 소개했다.


월리엄 캐리는 인도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화의 좋은 소식도 전하고자 하는 강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선포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회 전체에 끼치는 변화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그의 저서들과 원칙들, 선교사의 삶의 방식에 대한 글들과 함께, 그는 대위임령을 선포하며 살기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귀한 모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감동과 동기를 부여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가” 막 16:15.


-[아버지의 영향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