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교회

아버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열정이 있습니다. 불타는 열정, 거룩한 열정, 쉬지 않는 열정, 비전에 이끌리는 열정, 그 위대한 열정을 품고 아버지로서의 역사를 써 왔습니다. 눈물과 땀을 흘리며,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써 왔던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열정과 헌신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나 홀로 꿈을 꾸면 그것은 단지 꿈으로 끝날 수 있지만,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꿈은 잠을 자야 꾸지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열정을 품고 남편으로 아버지로 잠자고 있던 열정을 깨우십시요. 그리고 기도하며 성취를 향해 걸음을 내딪으십시요

인생에서 남자로 태어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취도 중요하지만 존경받는 남편이요,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 비전을 이루어 가도록 빌립보 교회가 함께 하겠습니다.


 
작성일 : 16-11-27 20:36
삶으로 신실한 모범을 보여준 아버지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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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신실한 모범을 보여준 아버지


마틴 루터 킹 시니어 Martin Luther King Sr., 1897-1984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아버지. 에벤에셀침례교회 담임목사였던 마틴 루터 킹 시니어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나타냄으로 성도들과 가족에게 가르쳤다. 그가 아들의 마음에 심어 놓은 꿈은 너무나 강력하여 미국의 역사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마틴 루터 킹 시니어 목사는 진리를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루는 아버지 킹 목사를 어느 백인 교통경찰관이 세웠는데, 그 경찰관은 그를 조롱하기 위해 ‘아이’라고 불렀다. 그때 킹 목사는 옆 좌석에 앉아 있는 아들을 가르치며, “얘가 아이고, 나는 어른”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어느 날 이 부자가 신발 가게에 갔는데, 종업원이 가게 뒤쪽에 있는 창고에서 신발을 사라고 말했다. 아버지 킹 목사는 그말을 따르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우리가 신발을 사지 않으면 않았지, 절대로 창고에 갈 마음은 없소.”


아들 킹은 아버지의 이러한 강직한 성품을 보며 자랐고, 이것들은 그의 성품과 사역의 일부가 되었다. 크로저신학교를 다닐 때, 그는 「희망의 약속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글과 연설들」에서 “제가 아버지에 대해 가장 존경하는 부분은 그의 진실된 기독교적 성품입니다. 아버지는 도덕적, 윤리적 원칙들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정직한 분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행동들에 대해 잘 알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아버지의 동기와 행동은 정직하다고 생각했었지요”라고 밝히고 있다.


남부 조지아의 소작농의 아들로 자란 마틴 루터 킹 시니어는, 어린 시절 마이크라고 불렸는데, 술 취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를 것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건장했다. 그가 혹시 아버지와 싸우다 불상사를 당할까봐 염려했던 어머니는 그를 애틀란타로 보냈다. 그는 이 큰 도시의 근교에 있는 작은 두 교회에서 설교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스무 살이었다. 얼마 뒤에 에벤에셀침례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하면 담임목사의 딸인 알베르타 윌리엄과 결혼했다. 1929년 1월 15일, 알베르타는 ‘마이크 주이어’를 낳았다. 그가 5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킹 목사는 자신과 아들의 이름을 종교개혁의 아버지 마틴 루터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어린 자신의 아들이 훗날 흑인 해방과 미국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의 시작과도 같았다.


아버지 킹 목사는 아들 킹을 중류층의 안전하고 편안한 지역에 있는 집에서 엄격하고 권위적인 환경 속에서 양육했다. 애틀란타에는 인종차별과 함께 흑인 상류층도 많았다. 아버지 킹 목사는 아들이 피아노 개인 교습과 오페라와 레슬링 경기와 같은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아들 킹은 아버지의 특별한 보살핌 아래 좋은 성품들을 빠르게 배워나갔다. 인종차별에 대해 저항한 로사 파크가 견디어야 했던 수모처럼, 킹과 그의 흑인 고등학교 친구들은 50킬로미터가 넘는 통학길 동안 백인 학생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서서 가야만 했다. 이러한 모욕을 겪으며 킹은 “나는 모든 백인을 증오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킹은 뛰어난 학업성취로 15살의 나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애틀란타의 모어하우수대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애틀란타의 흑인 상류층의 자녀들을 위한 일종의 신사교육학교였다. 그는 아버지의 목회 사역을 잇고 싶지 않아 의학을 전공하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사회학을 택했다. 킹은 대학에서 백인들과 함께 여러 활동을 하면서 백인에 대한 마음도 점차 부드러워졌다. 후에 그는 부모님이 자신에게 백인을 증오해서는 안되며 기독교인으로서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이것은 나중에 백인들의 억압에 대한 비폭력 저항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변호사 대신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점차 목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교회에서 자랐을 뿐 아니라 그의 유일한 형제와 삼촌, 할아버지와 고조 할아버지 모두 목회자였다. 그는 펜실베니아주에 있는 크로저신학교에 입학하여 1951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신학교 재학 중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목회에 대한 생각을 확고히 굳혔다. 그는 아버지와 신학적인 견해차가 있었지만, 아버지 킹 목사가 보인 모범을 따르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을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확고했다. 결국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그를 하나님의 일로 이끌었다. 그는 앨라배마주 맥간메리의 텍스터가침례교회 담임목사로 섬기는 한편, 조직신학을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학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당시 흑인들에게도 동등한 권리와 보호를 요구하는 인권 운동이 확신되고 있었는데, 이 운동에서 그는 지도적인 역할인 대변인 활동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미 전역에 있는 흑인들을 훌륭히 대변하는 자유의 목소리가 되었다. 1957년 그와 115명의 흑인 목회자들이 남부기독교기도력회의를 결성했다. 그는 반대 시위와 연좌농성, 거리 시위와 연설을 하며 자유와 평등의 목소리를 높였다.


1963년 그는 코레타 스코트와 결혼했고 두 명의 자녀를 낳아 그 중 한 명은 마틴 루터 킹 3세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인종과 신앙에 상관없이 손을 맞잡고 자유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자유가 울려 퍼져야 한다고 강고하면서 미국의 모든 어린이들을 위한 자신의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1968년 4월 3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멤피스의 메이슨 교회에서 자신의 마지막 연설을 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자신의 꿈을 나누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밤 여기 모인 여러분들이 이것을 알기 원합니다.” 다음 날 그는 암살범의 총에 저격당했다. 더 이상 그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지 못 하게 되었지만, 그의 말과 용기 있는 행동은 오늘 날에도 계속해서 메아리치고 있다.


마틴 루터 킹 시니어 목사는 에벤에셀침례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존경받는 지도자였고, 세 자녀에게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기독교적 사랑으로 맞서는 법을 몸소 보여 주었다. 아버지 킹 목사는 아들을 위해 철학적, 그리고 신앙적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아들을 위해 철학적, 그리고 신앙적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아들 킹 목사는 이것을 바탕으로 인정간 불평등에 저항하는, 매우 힘들지만 비폭력적인 운동을 이끌고 결국 승리했다. 아버지 킹 목사는 미국을 도전하는 변화시킨 아들 킹 목사를 자신의 삶으로 신실하게 모범을 보이며 가르치고 이끌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13:15.


[아버지의 영향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