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교회

아버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열정이 있습니다. 불타는 열정, 거룩한 열정, 쉬지 않는 열정, 비전에 이끌리는 열정, 그 위대한 열정을 품고 아버지로서의 역사를 써 왔습니다. 눈물과 땀을 흘리며,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써 왔던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열정과 헌신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나 홀로 꿈을 꾸면 그것은 단지 꿈으로 끝날 수 있지만,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꿈은 잠을 자야 꾸지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열정을 품고 남편으로 아버지로 잠자고 있던 열정을 깨우십시요. 그리고 기도하며 성취를 향해 걸음을 내딪으십시요

인생에서 남자로 태어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취도 중요하지만 존경받는 남편이요,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 비전을 이루어 가도록 빌립보 교회가 함께 하겠습니다.


 
작성일 : 17-07-11 08:36
하나님의 법을 감지할 수 있도록 가르친 아버지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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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처칠 드밀- Henry Churchill DeMille, 1853-1893


영화 ‘십계’의 명감독 세실 B. 드밀의 아버지. 신학자요 극작가인 헨리 처칠 드밀은 하나님 사랑과 극 예술에 대한 열정을 자신의 아들인 ‘왕 중 왕’, ‘십계’ 등 20세기 전반의 많은 고전 영화를 연출한 아들 세실에게 물려주었다.



세실 B. 드밀은 1922년 작품인 ‘아담의 갈비뼈’ Adam’s Rib를 개봉하면서 대중에게 다음 번 작품을 제안하도록 했다. 그래서 드밀의 언론 담당자는 로스엔젤리스 타임즈에 이 광고를 실었다. 일등 당첨자에게 당시 돈으로 천 달러를 주고 차점자들에게도 총 상금 천 달러를 주기로 했다. 다른 신문사들도 이 기사를 다루었고 원래 한 도시를 대상으로 한 이 제안은 전 세계에서 보낸 수천 통의 편지를 받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 주제는 종교적인 내용에서부터 세속적인 내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드밀은 종교적 주제를 제안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다. 미시간의 어떤 사람은 “사람이 십계명을 깰 수는 없지만, 십계명이 사람을 깰 수는 있지요”라는 말로 시작하는 응모 편지를 보내왔다.



이 편지는 세실 드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이 제안이 그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어떤 영화 주제보다도 거창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주제는 드밀로 하여금 자신에게 큰 소리로 성경을 읽어 주시던 아버지를 생각나게 했다. 헨리 드밀은 세실에게 하나님의 법은 규칙을 뛰어넘어 군위를 지닌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가르쳤다. 응모 내용을 모두 검토해보니, 총 여덟 명의 응모자가 십계명을 다음 영화의 주제로 제안한 것이 밝혀졌다. 세실은 이들 모두에게 일등 상금인 천 달러를 각각 지급한 뒤에 바로 영화제작에 착수했다.



이 유명한 영화감독은 자신의 가족 대대로 신앙이 중심에 있었다고 말했다. 선조들 가운데는 안토니 수도원장의 오래된 교회의 신실한 성도도 있었고 신부도 있었으며 자신의 유산을 고해에 헌납한 이도 있었다. 선조들처럼 그의 마음도 성경과 신앙에 대한 생각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1866년 헨리 드밀은 자신의 아마추어 작품인 ‘아무 소용 없네’라는 제목의 연극을 무대에 올린 것에 대해 무척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북군에게 패하고 망가진 남부에서 여준히 아마추어 연극 무대를 올릴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있었던 사실에 훗날 아들 세실은 신기해 했다. 그 대본을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를 존경했던 그는 대본이 조금 엉성했을지는 몰라도 이 연극이 아버지 마음에 연극을 사랑하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확신했다.



뉴욕에 사셨던 할아버지를 방문하기 위해 북으로 올라갔던 헨리 처칠 드밀은 브룩클린에 있는 아델피학교에 입학했다. 그때가 1867년 9월이었는데, 헨리의 삼촌 친구 가운데 한 명인 존 럭우드가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당시 헨리는 14살이었다.  존 럭우드는 종교와 학습과 인류의 형제애를 어떻게 잘 조합할지에 대해 가르쳤다고 헨리 드밀은 회고했다. 육체와 정신과 영혼 어느 것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아주 균형잡힌 교육이었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 속에서 헨리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이것은 헨리의 삶 속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1871년 헨리 드밀은 뉴욕에 있는 ‘종교와 학습증진을 위한 협회’의 장학금 175달러를 받아 컬럼비아대학에 입학했다. 자신의 종교 영화의 가치를 언급하는 수천 통의 편지를 전 세계로부터 받았을 때, 세실은 아버지가 받았던 175달러의 장학금이 자신이 ‘왕 중 왕’ 또는 ‘십계’의 감독을 맡으면서 받은 수백만 달러보다 훨씬 가치가 크다고 여겼다. 훗날 세실은 자신의 아버지의 인생에 투자하였던 그 협회를 도우려고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받았던 돈을 돌려줄 수는 없었지만, 그는 그 협회의 처음 목적과 일치하는 기부 활동을 다양하게 했다.




헨리 드밀은 사치스럽게 여가 생활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바르눔 박물관의 토요 무대를 관람하기 위해 용돈을 모으곤 했다. 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그는 신실한 신앙을 가진 전통 있는 남부 사람이 1870년대에 무대에 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농담처럼 자신이 배우가 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기도 했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자신의 가슴이 찢어질 것이라고 대답했다. 어머니의 이 대답은 무대에 서고 싶어했던 그의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다. 헨리 드밀은 설교가이자 신학자인 찰스 킹슬리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저서를 사서 열심히 읽을 정도였다. 1878년 5월 27일, 롱 아일랜드의 성공회 주교단은 헨리를 사제 후보생으로 받아들였지만 그는 안수를 받지 않았다. 1886년 그는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보다 훨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회곡 집필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헨리 드밀은 1872년 11월 공연 후에 여배우 틸리 사무엘을 만나 1876년에 결혼했다. 헨리는 그녀를 베아트리스로 불렀다. 맏아들 윌리엄 다음으로 세실이 1881년에 태어났다. 이들 가족은 뉴저지주의 오크랜드 근처 팜폰레이크로 이사갔고, 세실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헨리는 아들에게 성경과 여러 고전들을 읽어 주었다. 세실은 자신이 연출한 “‘왕중왕’ 과 ‘십계‘는 큰 등불아래 앉아 아버지가 소리내어 읽고, 아들은 아버지 의자 옆에 앉아서 들었던 팜폰레이크의 집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술회했다. 헨리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그의 장례식에서 그의 부인은 두 아들을 두 손으로 꼬옥 붙잡고 남편의 관 앞에 섰다. 그리고는 두 아들이 아버지처럼 고상하고 정직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녀는 두 아들이 하나님과 사람들을 돕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인생길을 걷기를 원했다.



세실은 성경영화를 제작하기로 했을 때 자신의 주변 사람들과 영화 산업 투자자들이 자신의 영화의 잠재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세실은 이들에게 자신의 영화 속의 인물들이 기존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는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모르던 배우들이 실제로 살아 숨쉬는 사람들처럼 연기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1956년 ‘십계’를 리메이크하여 대중에게 선보이자, 팬들의 편지가 드밀의 사무실에 쇄도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화 속의 하나님을 실제처럼 느꼈다고 말했다. 이에 그느 이 모든 것이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력 덕분이라고 말했다.



헨리 드밀은 오래 살지는 못 했지만, 아들들에게 성경을 사랑하고 무대 예술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쳤다. 유명한 영화감독 세실 드밀은 이 교훈들을 잊지 않았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어머니의 헌신을 기념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텔레비전은 여전히 ‘십계’를 방송하고 있으며 많은 미국인들은 이 영화가 최고의 영화이자 가장 고상한 영화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