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교회

아버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열정이 있습니다. 불타는 열정, 거룩한 열정, 쉬지 않는 열정, 비전에 이끌리는 열정, 그 위대한 열정을 품고 아버지로서의 역사를 써 왔습니다. 눈물과 땀을 흘리며,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써 왔던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열정과 헌신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나 홀로 꿈을 꾸면 그것은 단지 꿈으로 끝날 수 있지만,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꿈은 잠을 자야 꾸지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열정을 품고 남편으로 아버지로 잠자고 있던 열정을 깨우십시요. 그리고 기도하며 성취를 향해 걸음을 내딪으십시요

인생에서 남자로 태어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취도 중요하지만 존경받는 남편이요,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 비전을 이루어 가도록 빌립보 교회가 함께 하겠습니다.


 
작성일 : 17-02-12 12:37
대화의 중요성을 가르쳐준 아버지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41  
밀톤 라이트- Bishop Milton Wright, 1828-1917

오빌과 월버 라이트 형제의 아버지. 밀톤 라이트 주교는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호크에서 최초의 유인비행을 성공시킨 자녀들에게 유인비행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지성과 창조성과 탐험 정신을 키워주었다.


비행기 발명가이자 최초 비행사가 된 오빌과 월버 형제는 아이오와주 시다래피드에서 살았다. 두 형제가 생애 처음 쓴 편지는 오마하에 체류 중이던 아버지 밀톤 라이트 주교에게 보낸 것이었다.


“아빠, 오늘 아빠가 보내신 편지 받았어요. 어제 깡통에 물을 채워서 불 위에 올려놓았는데요. 조금 기다리니까 물이 끓기 시작했고, 위로 30센티미터 이상 솟아올랐어요.”


이 편지는 라이트 가정의 자유와 발명의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섯 자녀 중 셋째와 넷째였던 오빌과 윌버 라이트는 연합형제 교회의 주교였던 아버지가 장난감 헬리콥터를 사주었을 때부터 비행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순회 설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밀톤 주교는 이 장난감을 감추고 있다가 하늘로 날려 두 아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 헬리콥터는 코크와 대나무와 종이로 만들어졌고 꼬인 고무줄에서 나오는 동력을 이용해 날았다. 마치 불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듯이, 이 선물은 어린 오빌과 윌버 형제에게 비행기에 푹 빠졌음을 입증하는 일종의 세례와 같은 것이었다. 두 소년은 이 장난감이 낡을 때까지 가지고 놀았을 뿐 아니라, 그 후 오랫동안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장난감 헬리콥터를 만들었다. 두 소년은 예상과는 달리 장난감 헬리콥터를 크게 만들수록 잘 날지 못 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이들이 사람이 탈수 있을 정도로 큰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밀톤 주교는 자상하면서도 엄격했고 무엇보다 주일성수를 강조했다. 그래서 주일에는 놀거나 일하는 것을 자제해야 했고 다만 읽거나 편지 쓰는 것은 허용되었다. 훗날 오빌과 윌버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일요일에는 비행하는 것을 거절했다. 주일 여부와 상관없이 카드놀이는 항상 금지되었는데, 그것이 죄라기보다는 시간 낭비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산타클로스는 금지된 단어였고, 대신 성탄절 아침마다 간소한 선물을 주는 것은 허용되었다. 오빌과 윌버는 연합형제교회의 주일학교에 매주 출석했지만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불가지론자의 책들과 다른 책들도 읽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던 라이트 가족은 할아버지 코르너가 살았던 곳에서 가까운 인디애나주의 리치몬드로 이사 갔다. 아마도 두 소년은 그곳에서 농장의 헛간을 헤매고 다니며 할아버지의 발로 가는 마차에 대해 연구를 하며 자신들의 기계에 대한 지식을 개발했던 것 같다. 가족이 다시 오하이오주 데이톤으로 이사 갔을 때, 이들은 고등학교를 다녔으나 졸업은 하지 못했다. 이들은 인쇄소와 신문사를 운영하다가 1892년도에 라이트자전거회사를 설립하여 자전거를 만들고 수선했다. 오랜 기간 라이트 형제는 많은 비용 지출을 감수하고 자신의 사업을 등한시하면서까지 항공 산업에 진출하려고 기회를 엿보았다.


라이트 형제는 여행 다니는 것을 즐겨했다. 오래전에 밀톤 주교가 20대 후반이었을 때 교회 개척선교사로 필라델피아, 뉴욕, 파나마, 샌프란시스코, 포트랜드, 오레곤을 순회하였다. 두 사람은 아버지처럼 여행을 좋아해서 비행 실험을 위해 갔었던 키티호크와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아우터뱅크 뿐 아니라 유인비행을 선전했고 비행기를 완벽하게 완성한 뒤에 미국 전역과 유럽을 여행했다.


윌버는 1900년에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여행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며칠 뒤 비행기 실험을 위해 로아노크 섬 근처 노스캐롤라이나 해안으로 여행을 가려고 계획 중입니다. 아마도 몇 주 걸릴 것 같아요. 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간다고 생각하니 설레이네요.”


윌버는 교단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버지를 도와야겠다는 부담을 느꼈다. 교단 출판 업무를 담당한 어느 평신도가 재정을 잘못 사용해서 생긴 문제였다. 라이트 주교는 그의 부정직함을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었고,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를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교단의 일부 사람들은 오히려 라이트 주교를 내보내려 했다. 윌버는 그 평신도의 부정직함의 증거를 찾기 위해 회계장부를 조사했다. 증거를 찾은 그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그 평신도의 부정직함을 지적하는 내용의 글을 썼다. 라이트 가족 모두는 두 형제의 비행기만큼이나 이 일에 관심을 두고 지켜보았다. 라이트 주교는 자신의 자리를 지켰지만 이 싸움은 아주 오래갔다. 마침내 두 형제는 자신의 일을 계속 하기로 결정하고 키티호크에서 새 글라이더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두 형제는 4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고생했지만 드디어 1903년 12월 17일 글라이더에 엔진을 장착했다. 후에 윌버가 속도를 충분히 내어 땅을 박차고 이륙한 뒤에 59초 동안 비행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그날, 돌풍이 비행기 날개 하나를 망가뜨리기 전까지 세 번 더 비행했다.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 전보를 통해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가정부였던 캐리 크럼바그가 그 전보를 윗층에 있던 라이트 주교에게 전해주었다. 잠시 뒤에 그가 내려와서 차분히 말했다.


“아들들이 비행에 성공했다는군요.”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날 저녁에 밀톤 라이트 주교와 그의 동생 캐서린은 들떠 있었는데 비행에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두 형제가 성탄절에 맞추어 집에 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성탄절 식사에 쓰일 칠면조에 속을 넣는 것을 늘 윌버가 했는데, 윌버만의 비법이 더욱 맛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라이트 주교는 아들 로린에게 전보를 보내었고, 아들 로린은 이것을 연합뉴스 데이톤 지부에 전했다. 그때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59 초라구요? 59분이라면 뉴스거리가 되겠지만......글쎄요.”

그 기자는 이것을 기사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시내티 인콰이어러〉를 읽은 후 편집자가 뒤늦게 이 이야기를 기사화했다.


비행이 성공한 뒤에 라이트 주교는 자신의 유명해진 아들들에게 누군가 그들을 이용하려 들거나 그들의 영광을 가로채려 들 수 있다고 조언해주었다. 1907년에 윌버가 프랑스에 있을 때 밀톤 주교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너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 네가 하는 모든 일을 잘 감당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가능한 한 너의 의견을 관철시키도록 노력해라. 대개 부자들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데 뛰어나니까 말이야.”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안심을 시키는 내용의, 특별히 음주와 유흥과 관련해서 답장을 보냈다. 「라이트 형제: 이들이 비행기를 어떻게 발명했나」라는 책을 따르면, 오빌은 같은 해 프랑스에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저희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교회에 예배드리러 갔으며 아직 한 번도 술 취해 본 적이 없습니다.”


윌버도 비슷한 내용을 적었다.


“음주와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들에 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집을 떠난 뒤에 지금까지 저희가 마신 포도주는 아무리 해봐야 한 잔도 채우지 못 합니다. 오빌과 저는 부모님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절제와 자제는 다른 영역에서도 잘 나타났다. 라이트 주교는 이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고 흡연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얼마나 기쁘게 생각하는지를 편지에 적어 보냈다. 아버지는 그렇게 절제된 삶이 이들이 발명한 비행기보다 이들에게 더 유익하다고 말했다. 밀톤 주교는 인기가 부질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들에게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그는 아들 윌버에게 그를 마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되살아나기라도 한 듯 부산을 떠는 프랑스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조언했다.


1910년 5월 25일, 오빌은 82살이 된 아버지에게 생애 처음 비행기 여행의 경험을 선물했다. 아버지는 이것을 매우 즐겼을 뿐 아니라 더 높이 올라가자고 부탁할 정도였다.


1912년, 윌버는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유언장에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담대하고 올곧은 인생의 모범을 보이셨으며 내가 잘 되기만을 바라시던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라이트 주교는 자신의 일기장에 윌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기억력이나 지식에 있어 윌버와 견줄 사람은 없었다. 그 아이는 정이 많으며 재치 또한 대단했다. 또한 말이 많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글이나 말로 표현할 수 있었다. 화를 내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윌버는 글을 많이 썼고 적절하면서 아주 훌륭한 연설을 하곤 했다.”


윌버가 사망한 뒤에 자신이 1917년에 죽을 때까지, 라이트 주교는 윌버에 무덤에 찾아가거나 브리태니카백과사전을 읽거나 족보를 만드는 일에 자신의 시간을 사용했다. 1917년 4월 3일 밀톤 라이트 주교는 마침내 88세의 나이에 수면 중에 죽었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었고 남다를 것이 없었던 두 기계공들은 아버지 밀톤 라이트 주교로부터 격려와 힘, 도전, 용기, 믿음, 자기 절제를 공급받았다. 밀톤 라이트 주교는 자신의 아들들을 훌륭히 가르쳤고, 자주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이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슴을 강론할 것이며” 신6:6-7